그리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 소위 말하는 낙하산과 같은 꼴로 취직에 성공했으니 직장 생활 힘들다고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일 하는지 굳이 물어본 적 없었으니 과거의 친우들이 무얼 하고 지내는지 알 턱이 없다. 졸업 직후, 한 철의 혼란을 겪고 나서 의도한 것마냥 모든 짐들을 모두 호그와트의 고성에 버려두고 몸뚱이와 지팡이 하나만을 챙겨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 당도해,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그 혼란 속 인간들의 피가 튄 것처럼 느껴져 서너 시간 내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었다. 식지 않는 욕조의 물 사이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아롱지듯 시야 속 담긴다. 두 손 모아 물을 손바닥 가득 담아 보면, 그 물보다 선명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검은 낙서였다. 낙서? 아니, 영영 남게 될 문신. 욕망 넘치는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유혹 어린 시선 보내는 뱀을 토해내고 있는, 그.
숨기려 했던 것은 이 피부 위의 각인이 아니다. 허나 결국 결론은 그리 났으니 이 현재를 어찌 받아들일지 모호하기만 하다. 지나치게 달구어진 공기 탓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서야 물 속을 벗어난다. 아무리 몸을 담그었다 빼 보아도 깨끗해진다는 느낌 하나 없건만 어째서 씻는다는 행위를 그와 연결짓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이 세상 한 번 큰 홍수라도 일어난다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고 완벽한 세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아, 허망하여라. 생부가 지어준 이름에 붙잡혀 그 가공된 이야기에서 좀처럼 빠져나올수가 없음을 느지막이 깨달았다. 당신 도취된 이야기에 나를 끼워넣지 말라고!
짜증이 일어 견딜 수 없었다. 일주일 후 생부를 찾아갔다.
애도를 했어야 할까? 깃털보다 가벼운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 * *
1999년, 생각해보면 이 숫자 자체도 그 가공된 이야기에서 파생된 산물이다. 그러니 몇 달 이후 그것이 2로 시작되는 놀라운 수로 바뀐다는 것이나 세계의 멸망이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뿐. 언제 끝이 날지 모를 하루를 시작한다. 어찌 된 일인지 날이 갈 수록 잠이 줄어 해 뜨기 직전 눈을 감아도 선선한 새벽 공기 가득할 시간에 눈을 뜨게 된다.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은 재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수면을 취한 것만으로도 몸은 눈 감은 것이 싫었던 것인지 잠이라는 휴식을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
꿈을 꾸었다. 꿈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허망하고 가치 없는 환상이었다. 온 바다의 물을 끌어와 씻어내어도 청결해지지 않을 것 같은 검붉은 손이 되어, 장갑도 손수건도 하나 쥐지 않은 손으로 제 앞에 있는 이의 육체를 틈 없이 더듬고 만져대는 꿈. 그 몸 가득히 검붉은 물이 드는 것을 보아 경멸감 가득한 행복이 차오른다. 무릎 꿇고, 몸 수그려 상대 얼굴도 모르는 주제에 알지도 못 하는 사랑을 고백한다. '잡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소리를 한가득 들은 이후 꿈에서 깨어난다. 본디 꿈이란 내재된 욕망의 방증이라고, 기다란 장갑을 익숙하게 덮어 끼우며 그 말에 납득한다. 구태여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필요치 않은 일에 정신을 둘 필요는 없다. 다만 일상이다.
신문사 'The Uroborus'의 근거지는 런던에 위치해 있다. 명확히 하여, 노라 로보루스와 마리아 로보루스의 공동 거주지 바로 옆 라인의 주택 지하가 그것이다. 신문에 기사를 투고한 기자들의 이름은 죄다 가명들이라 그들의 정체를 추리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그 이름을 모두 지고 숨김 없이 활동하는 호노라 메살리나, 그녀가 유일한 얼굴일 뿐. 아니, 기실 그것도 진실이라 할 수는 없었다. 호노라 메살리나라는 이름의 마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라'라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청했다. 로보루스이자 로보루스가 아닌 그 여자를 주축으로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몇 모였다. 언젠가 다시 올 '그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언젠가 찾아올 우리의 흐름을 위하여!
노라 로보루스, 스타슈에트 부자父子, 노먼 마하트야, ……패기롭게 지팡이 들고 나서기엔 그 힘이 부족하여 숨죽여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 지팡이 대신 펜을 쥐어 그들의 진실을 전하고자 큰 뜻을 품었던, 순수의 시대. 검은 부엉이 날아와 어둠의 마왕, 그의 부활을 전해 들었던 그 때 황홀한 비명을 내지르며 축배를 들었던 이들이 여즉 이곳에 남아 있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그들의 순수한 피가 지하에 머물러 있다.
마리아 로보루스, 그들의 주축이 된 로보루스의 이름을 이었다지만 큰 뜻을 펼칠 그 치들은 머글의 피 섞인 이방인을 그들의 쉼터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여전히 불순물이며, 동시에 이방인이다. 예상 않은 일은 아니었으니 놀라울 리 없다. 보이는 모습 관리할 필요 없는 그들, 이 쉼터 안에서만큼은 명백한 혐오를 드러낸다. 닿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 섞고자 하는 일도 원치 않는 이가 있어 쪽지 통한 대화만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혐오 섞인 시선, 그들의 숨길 수 없는 우월함에 대한 과시. 말수는 줄었지만 웃음이 늘었다. 그럴 때면 이유 모를 충만함이 차오르고는 했으니까. 그래요, 차라리 날 싫어한다 말하세요. 철컥 소리를 내며 맞아 떨어지는 이 환호는 자기혐오의 연장선인지라.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좋아요. 사랑하기까지 한답니다. 하고, 성모聖母라도 된 양 인자한 미소가 샌다.
조금 동떨어진 책상에 앉아 펜을 잡는다. 쓰는 글은 가지각색. 편지가 되기도 했고, 기사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수필이 되기도 했다. 유행처럼 흰 머그잔에 담긴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비주기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 신문사 정규 직원, 유일한 부자 중 아들 쪽. 경멸하는 시선이 유별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니 나를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시간 좀 비워."
그러니 당신, 내 폐를 쥐어짜 죽여 버리시려고. 후에 살해되어 죽게 된다면 그 가해자는 이 니코틴 덩어리이겠거니, 싶었다. 변변한 흡연실 하나조차 없는 지하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모두를 질식시켜 죽여 버리겠다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한 마디 불평이 없었던 이유는 뻔하다. 담배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기자랍시고 모두가 따르게 되는 유행처럼, 식어빠진 커피처럼 폐를 쥐어짠다. 다가가고 싶지 않은 죽음을 보는 일은 위험하고도 유혹적이기에 시가 커터 잡는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옛 말 담뱃잎이 몸에 좋다는 얘기도 있었건만 그리 믿음 가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또다시 망설이지도 않고.
죽어가는 기분이 든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양수 터뜨리고 태어나 인간이 하는 일이란 결국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음을 향한 여정, 전부가 아닐까. 그 정체 모를 결말이 두려워 한 때는 몸을 떨며 책 덮길 거부한 적도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미래에 뜻 두기는 가볍고, 결국 몇 초 짧은 순간으로 끝낼 현재만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 검은 머리 선명한 남자와 함께 연기를 공유한다. 특별히 오가는 말은 없다. 하루 두 번, 어쩌면 네 번. 굳이 이 구석진 자리에 와 종종 호흡조차 버거운 이방인 곁에서 시가 끝을 자르는 것은 날 일찍 죽이려는 시도라는 생각 들 뿐이라고.
그렇게 몇 시간 보내다 보면 해가 진다. 지하에서 해 지는 것을 볼 수는 없건만 그보다 일찍 자리를 뜨기에 그것 인지하기 어렵지 않다. 첫 투고될 기사를 노라 로보루스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담배 냄새 지독하게 밴 코트를 집어든다. 봄이라 하더만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겨울이 덜 가신 걸까? 언젠가는 올 봄이니 크게 중요하진 않겠지만서도. 돌아오는 봄조차 봄이 아니겠지. 허나 이조차 제 일이 아닌 양 방관한다.
3월 31일. 그러니 4월 1일의 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집이 너무 좁다. 방랑하듯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